법원이 증거은닉 혐의로 청구된 국정원 댓글부대 관련자 구속영장을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하자, 법조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검찰 역시 두 차례나 입장을 내고 "사법 불신이 우려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 '국정원 댓글'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 23일 오후 국정원 퇴직자 모임인 양지회의 서울 서초구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뒤 압수물을 옮기고 있다. ⓒ 연합뉴스 |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오민석 부장판사는 국정원 댓글조작 팀장으로 활동한 양지회 노씨의 영장을 기각하며 "범죄혐의는 소명되나 수사 진행 경과 등에 비춰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증거은닉이 포착된 양지회 박씨에 대해서도 "피의자가 은닉한 물건의 증거가치, 피의자의 주거와 가족관계 등에 비춰 피의자가 도망하거나 범행에 관한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기각 사유를 들었다.
검찰 즉각 반발 "사법 체제 불신 우려된다"
검찰은 즉각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놨다. 오마이 뉴스에 따르면 수사를 담당한 서울중앙지검은 같은 날 오전 "이 건은 양지회가 국정원으로부터 수억대의 국가 예산으로 활동비를 지급받으며 노골적인 사이버 대선 개입과 정치관여를 한 사안"이라며 "수사가 이뤄지자 단순한 개인적 일탈로 몰아가기로 하면서 관련 증거를 은닉했음에도 구속 영장을 기각한 법원의 판단은 납득하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위와 같은 입장을 밝힌 지 약 8시간 후인 오전 11시 42분경 검찰은 A4용지 1장 분량을 입장을 배포하고 최근 잇따른 법원의 구속 영장 기각 결정에 재차 불만을 드러냈다.
검찰은 "최근 중앙지방법원에 새로운 영장전담 판사들이 배치된 후, 우병우·정유라·이영선·국정원댓글 관련자·KAI 관련자 등 주요 국정농단 사건을 비롯한 국민이익과 사회정의에 직결되는 핵심 수사의 영장들이 거의 예외 없이 기각되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적폐청산 등과 관련된 진실규명을 수행하기가 사실상 어렵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 일련의 구속영장 기각은 이전 영장전담 판사들의 판단 기준과 많은 차이가 있다"면서 "국민 사이에 법과 원칙 외에 또 다른 요소가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제기되고 있어 결국 사법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귀결될까 우려된다"고도 덧붙였다. 노씨는 원세훈의 공범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
원세훈은 8월 30일 파기환송심에서 국정원법 위반과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서울고등법원 형사7부)는 "18대 대선 당시엔 인터넷이나 SNS가 선거운동으로 활용되고 있었으므로 특정 정당 후보자에 대한 선거운동으로 인식하기 충분하다"며 "이같은 사이버 활동은 국정원의 정당한 직무집행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법조인 출신 정치인 "증거 숨겼는데 영장기각 말이 되나"
법조계 반응도 뜨겁다. 조지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디지털위원회 위원장은 "원세훈 국정원장이 징역 4년 나왔는데 그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거나 조직적으로 (댓글 활동을) 했다는 부분에 대해 가볍게 본 것 같다"며 "원칙적으로 불구속 수사는 맞지만, 법원이 민주주의 근간을 해친 범죄에 대해 구속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은 게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판사 출신인 윤아무개 변호사는 "범죄 혐의는 인정하면서도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고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건 드문 경우"라며 "피의자가 자백하고 실형 가능성이 낮을 땐 기각될 수 있지만,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이례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경우 다른 공범들과 말을 맞춰서 진술을 바꿀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법조인 출신 정치인들은 증거은닉 정황이 포착된 박씨의 구속영장 기각된 데 특히 주목했다. 그는 검찰이 양지회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하자 내부 자료를 숨기고 컴퓨터 기록을 삭제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증거 은닉한 혐의가 잡혔는데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며 "다른 공범자들에게 '증거은닉을 해도 괜찮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영장이 나와야 앞으로의 수사도 속도를 낼 수 있는데 오히려 기각됐다"며 "법원이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겠냐"고 꼬집었다.
검사 출신인 같은 당 금태섭 의원 또한 "국회의원이 법원 결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어렵다"면서도 "증거를 은닉한 경력이 있는데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는 사유는 이해가 안 간다"고 밝혔다. 이어 "구속영장은 엄밀히 말하면 처벌의 의미라기보다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를 막는 건데 이 사건이야말로 그런 것 아니냐"고 말했다.
법원은 증거은닉 혐의라고 무조건 구속영장을 발부하진 않는다는 입장이다. 법원 관계자는 "구속 사유는 도주에 대한 염려인데 주거와 가족관계가 일정하고, 일반적으로 봤을 때 사실과 관련된 증거가 다 밝혀졌을 수 있다"며 "법원이 판단할 땐 과거에 벌어진 일을 기준으로 한다"고 설명했다.